2010년 10월 09일
‘겨레말큰사전’ 편찬 중단 위기… 정부 갑작스럽게 예산삭감
2010년 한글날을 맞이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시인 고은의 호소
국민 여러분.
그러나 요즘 저는 심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절반의 고개를 넘어온 《겨레말큰사전》 사업이 큰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국회에서 의결되고 배정받은 기금 중에서 편찬사업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연구용역자들은 편찬사업에서 손을 떼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고 말았습니다. 50%의 공정을 넘긴 사전편찬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는데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저는 정부당국의 정책적 판단과 남북관계를 고려해 인내하고 인내해왔습니다. 천안함 사건 등의 남북관계의 우여곡절을 보면서 정부당국에서 긴 안목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기다려 왔습니다.
국민 여러분.
당장에는 그 어떤 실효성도 없어 보이지만, 조선어학회의 활동과 《겨레말큰사전》의 남북공동사전 편찬사업 등은 콩나물을 키우는 일과 비슷합니다. 시루에 부은 물은 순식간에 밑으로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으면 어느새 콩나물은 알맞게 자라 있습니다. 그러나 물붓기를 멈추면 콩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이내 썩고 맙니다. 모국어를 집대성하고 그것을 사전으로 만드는 일도 바로 이와 같아서 하시라도 멈춰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물붓기가 중단될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모국어의 산하에서 시를 써온 저로서는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려운 시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펜을 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은 2006년 이래 남북교류협력사업 중에서도 비정치분야에서 가장 차분하게 성과를 쌓아온 학술사업입니다. 정부당국 및 학계에서 모범사업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민족문화의 원형이자 통일 후 사회통합의 가장 큰 모태가 될 ‘언어의 통일’을 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 준비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여야가 힘을 합쳐 법으로 정하고 매년 국회에서 예산을 배정해온 사업을 교추협 등에서 임의로 재단하고 무산시키는 것은 심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 사업이 중도에 무산되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의 발생은 그야말로 민족적 재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이 분단된 상태로 60년이 넘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 자체도 심히 안타깝지만, 무엇보다도 사전과 같은 비정치적인 학술교류마저도 막힌다면, 민족과 국가의 품격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2010년 한글날을 앞두고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은
# by | 2010/10/09 19:15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