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철거민살인진압규탄

UG 크리슈나므르티 - 오직 모를 뿐

깨달음은 없다 1  전문 보기
이 상태는 비지식非知識 상태(몰라)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벽에 걸린 시계를 삼십 분 정도 바라보고 있어도 몇 시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시계라는 것도 모르죠.
내면에는 놀라움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의 존재가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가 되죠.
이 상태는 경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죠.
제가 배운 모든 지식은 필요하지 않으면 배후에 남아 있습니다. '풀린 상태'이죠.
누군가 저에게 시간을 물으면 지식은 쏜살같이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대답을 하죠. 그리고 저는 다시 비지식 상태,(몰라) 경탄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깨달음은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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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감각기관은 지금 제 앞에 있는 것들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과의 접촉이 아니라 이 방안에 있는 것들과의 살아 있는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감각행위와 완전히 조율되어 있다면 내일은 무엇을 먹느냐 하는 불안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나, 진리, 실체에 대한 억측이 들어갈 공간도 없겠죠.
이 상태는 전지(全知)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 영원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 질문이 멈춘 상태입니다. 그런 질문은 유기체가 기능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런 질문이 들지 않습니다. 유기체 기능 방식은 그런 질문을 위한 공간을 남겨 두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없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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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부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그것이 눈을 속이는 분열을 했고, 주체와 객체로 나뉘었습니다.
그 분열을 통해 연속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의식 안에 있는 분열인 성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존재 연속성만이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하거나, 영이고 신성하며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로 변화하고 싶어하는 한 '나'는 계속될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머물지 못합니다. 떠나가 버리죠.

생각을 통해서으로, 해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파악해 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노력을 멈춘 그곳이 바로 제가 묘사하고 있는 곳이죠.
이해하려고 애쓰고,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런 작위가 없는 상태. 그 상태가 제가 말하는 그 상태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나'라는 것이(에고) 생겨납니다. 생각이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계속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사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 '나'를 지킵니다. 생각에서 나온 모든 것은 파괴입니다. 결국 여러분을 파괴할 입니다.

여러분은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음과 '나'는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생동안 단 일초라도 깨어 있었다면 '나'라는 연속성은 깨졌을 겁니다. 경험구조 환상은 박살이 났을 겁니다.
'나'는 무너지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합류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다면 '나'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것이죠. 그저 자기가 아는 낡은 것을 경험한 것 뿐입니다.


원인이 없습니다. 하려고 마음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끌어올 수 없죠.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했더니 이 상태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사람은 의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의사전달을 못한다면 어느 정도는 확실합니다.
육체에는 대체수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고 경험구조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자기 방식으로 육체를 떠맡습니다. 육체 기능은 완전히 다른 활동을 합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만 제외하고는 사고가 끼어들지 못합니다.
권투경기에 비교하자면 여러분은 수건을 던져야 합니다. 완전히 무력하게 되세요.
아무도 여러분을 돕지 못하고, 자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미쳤다
몸은 더할 나위없이 지성적이기 때문에 그런 부류 과학, 신학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가 삶과 죽음, 자유 등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공상 장식품들을 버려라. 그러면 몸은 방해받지 않고 아주 조화롭게 작용한다. 몸은 그대나의 도움이 필요없다. 그대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몸이 조화롭게 기능한다면 그대는 이렇게 불멸성, 내생, 즉음 따위에 대해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몸은 영원불멸한다.

자살해도 소용없다! 자살 후에 몸이 해체되는 것은 다른 형태를 갖고 이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이다. 결국 끝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시체는 배고픈 개미들을 먹여살리고 좋은 거름이 된다. 다른 생명체를 위한 영양분이 되는 이다. 그대는 삶을 끝낼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영원불멸하므로 "과연 불멸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특정한 형태이 종말을 고하는 것은 다만 다른 형태를 갖고 지속하기 위함이다. 몸은 이것을 안다. 내생에 관한 의문은 두려움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대에게인 삶을 이야기하는 자들, 소위 영인 지도자하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내생에 대한 그대의 기대와 두려움은 곧 그들의 생계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처럼 누군가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인간 미래에 대해 진정한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 알량한 미래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몇 시간씩 인류 미래와 자비에 대해 논하는 것은 형식이고 의례인 행동일 뿐이다. 진실로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대 자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생이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유치한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안내자로 스승이나 사원, 경전에 의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대는 항상 문제에 대한 치료책으로써 해답을 구하고 있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답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소용없다. 본래 그러하다.

내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해탈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대 스스로 찾아라
다른 말로 한다면, 내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된 목적은 그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들을 침묵 상태로 밀어넣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 침묵 안에서 무엇인가 가능해진다. 아니,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우주에는 절대로 오염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순수 의식, 절대으로 청정무구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 의식은 그 궤도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대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지구 어느 구석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이 의식은 인류 전체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경계선도 없고 한계도 없다.

용기를 가져라
무엇이 있건 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용기이다. 이것이 지성이다.
"나는 지금 그대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용기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은 장차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고통받는괴로운 이유는 '있는 그대로'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가 없다.
그대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대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by 누운돌 | 2014/04/12 10:35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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