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5월 13일
형용사 + 명사 -> 부사 + 동사
<여성주의를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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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맥심이 보내는 메시지다. "멍청한 소리 작작하라"는 일갈이든 "좋아 죽겠냐"는 비아냥이든 뉘앙스만 달라질 뿐 논점은 같다. "그러지 말고 안 나쁜 보통 남자를 좀 좋아해 달라"는 투정으로 보아도 마찬가지다. 폭력에 대한(을) 미화로(아름답게) 해석될(할) 여지가 이 커버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난 모르겠다. 아니, 그런 건 없다.
"여성들이여, 부디 어리석은 함정에 빠지지 마시라" 도리어 여성 구제적(하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커버를 두고 승질을 내는 감각의 부재는 오히려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가장 심각한 건 이 커버를 보고 여성에 대한(을) 폭력적(때리는) 시선을 문제 삼는 그 피해의식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탈이 바로 '여성주의'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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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세상에 '여성 해방운동'이라니, 우리는 같지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모양이다. 여전히 여성이 불리한 필드가 있겠고 물리적(몸이) 약자란 사실엔 변함이 없겠으나 - 사실 요새는 꼭 그렇지도 않다 - 삼십년 가량 여자로 살아보니 '오로지 내가 여자라서' 겪는 억압이니 억울함 같은 건 정말 1도 없더라.
물론 나의 감상을 일반화할(모두가 그렇다고) 순 없는 일이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페미니즘을 부르짖는 일부 여성들의(이 하는) 행태는 '여성해방'은 커녕 여성이 혐오의(하는) 대상이 되는 소위 '여혐'의 물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말, 행태)
단지 개인 차원의 문제 혹은 비극인 것도 전체 여성이 직면한 고난인양 일반화하는(이 다 그렇다는) 건 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이 (다수가) 안고 있는 문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 중 데이트 폭력이나 성폭력 피해 등의(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이 꽤 많다는 것도(사실) 이런 경향과 전혀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억울한 범죄 피해자든 유독 남자들에게 존중을 못받는 한 개인이든 그 심연의(깊은) 고뇌가 '아 이 모든 게 내가 여자라서...'로 난데없이 확장되는(하) 순간 문제는 시작된다. 이 증상의(은) 이름은(이) '망상'이다. 이건 병리적(이 생기는) 현상이므로 전체 여성의 지위가 올라간들 그녀들 삶이 개선될 여지가 없음은 물론이다.
여성의(이 누려야 할) 권리가 여전히 저평가 돼 있고 양성평등에 대한(을) 더 심도있는 이해가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라면 얼마든지 귀 기울일 수 있다. 문제는 그녀들이 그런 정상적인 목소리를 내는 걸 본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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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는 이 땅에서 이미 그 소명을 다한 이론이다. 여성운동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여자가 운전만 해도 불법이고 아직도 명예 살인이 행해지는 그런 나라들일 것이다.
2007년 '한국 소비자보호원'이 '한국소비자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같은 이치다. 이제는 소비자를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소비자에 대한(을) 억압이고(하고) 차별이다. 과거에 행해진 수많은 뻘짓들을 차치하고라도 '여성부'같은 건 애초에 사라질 수순이었다.
역사 속에서 '진짜 여성운동'에 몸바친 언니들의 노고와 희생으로 더 이상 여성 해방에 목놓을 필요 없는 세상이 왔건만 아직도 여성주의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들, 바로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이름 위에 겨냥되는(하) 화살의 숫자를 늘려 여성의 지위에 관한 시계 바늘을 더디게 한다.
여자에겐 투표권도 없고 사회진출도 못하고 엄연한 차별이 존재하던 때의(에) 여성주의자들이 부르짖은 건 '이퀄'이었다. 같은데 다르게 취급되니(하) 같은 걸 같게 하자는 합당한 주장이었다. 요즘은 도리어 여자가 열등하다는 인식을 스스로 갖고 있는 여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된다.
페북에 셀프 엄선한 헐벗은 사진들을 올려가며 어떤 변태새끼든 '여성주의자'인 나에게 감히 뻘소리 한번 해보렴 파들파들 하는건 개인의 자유다. 도저히 존중 못받을 모순된 행태로 여성 억압에 도리어 일조하고 있는 걸 말릴 수야 없겠지만 그 해괴한 논변에 '여성주의'를 가져다 붙이는 꼴은 좀 안봤으면 좋겠다. 보는 즉시 혈압이 상승하니 이제 우리는 여성주의를 주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주의하라2>
"살아보니 '오로지 내가 여자라서' 겪는 억압이니 억울함 같은 건 정말 1도 없더라"고 쓸 수 있었던 건 이 사회가 더 이상 그런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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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다른 요소는 전혀 없이 '오로지 여자라는 그 이유' 단 하나만으로 억압을 당하는 사회가 아니다. 명예살인이 행해지고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등의 경우는 '오로지 여자라는' 이유로 발생하는 억압이 맞고 이런 사회는 여성해방운동이 필요한 사회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들 - 성희롱, 여성범죄, 가사 노동, 미적 기준 등 - 은 대부분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자. 나 역시 이름 대면 알만한 사람에게 천연덕스러운 성희롱을 당하고 아연한 일이 있지만 그걸 단순한 남녀구도로만 생각하진 않는다. 다수의 성희롱은 권력의(으로) 상하관계가 엮여 있을 때 발생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학창시절 또래 남학생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사례가 흔한가? 아니다. 최근에는 여성상사로부터 성희롱 당하는 남성의 사례도 늘고 있으며 빈도의(는) 차이가 있을 뿐 더 이상 한 쪽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개입되면 갑을문제가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사인간의 문제가 된다. 성폭력을 포함한 강력 범죄의 경우 상대는 일반 남성이 아닌 비정상적 '범죄자'다. 여성주의가 강력범죄자의 수를 줄이는 데 실질적 기여를 하는가? 역시 아니다. 잡지의 커버에 등장한 '범죄 장면'의 묘사에 여성주의자도 분노할 수 있지만 여성주의자이기에 더 분노해야 할 이유같은 건 없다.
결혼을 한번 해보라고들 한다. 여성이기에 떠안아야 하는 가사노동의 책임 등을 예로 드는 것인데, 그렇다면 남성에게는 남성이기에 짊어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이 져야 할) 책임이 있다. 맞벌이가 보편화(이) 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남자가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인식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은가. 직업이 없는 기혼녀는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을 얻지만 직업이 없는 기혼남은 그냥 '무능력한 실업자' '찌질이 낙오자'가 된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남성주의'를 들고 나오지 않는 건 성역할에 대한(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발생하는 차별일 뿐 오직 한 쪽만이 짊어진 일방적인 억압의(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의 경우엔 일방적이지만 성역할에 대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남녀 양쪽이 모두 짊어진 문제라는 의미다.)
여성의 미에 대한 기준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로 인한(때문에 입은) 피해를 극복하게 하는 건 '여성주의'가 아니라 개개인의 '자존감'이다. 내가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맞지 않아 시무룩한 마음이 드는 건 여성억압 때문이 아니라 자존감 부재 때문인 것이다. 이런 사례가 여성 억압이 된다면 원빈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온 남자들이 오징어가 되는 건 심각한 남성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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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여성이(을) 차별받는(하) 사례들은 존재하지만 사안별로 다른 사회문제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걸 여성주의라고 따로 떼내어 "여성=약자"로 발전시킬 당위성은 거의 사라졌고 앞으로는 아예 사라질 것이다. 성담론처럼 보이는 문제 중 다수는 개인 간의 문제 혹은 다른 가치 문제로 해석해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것들이다.
여성주의가 필요없는 사회가 바로 여성운동의(이) 지향점이며, 필요 이상으로 여성주의를 부르짖는 건 외려 여성에게 약자라는 낙인을 찍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금 시점에 필요한 건 일과 가정의(이) 양립을(하는) 가능케 하는 '모성'에 대한(을) 보호지(하는) 여혐의 피해자가 되는 여성들에 대한(을) 보호가(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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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차별을 1도 안받아본 인생이란 게 어디 있을까. 오로지 여성이라는 그 하나의(가지) 이유로 억압받는(하) 일은 없었다는 의미고 그건 대다수 여성도 마찬가지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숱한 개인적(이) 경험을 통해(하고) 깨달은 사실은, 나 자신의 문제 - 문제의(가 난)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경우와 단지 개인적 차원의 문제인 경우 모두 - 를 구조적인 전체의 문제로 치환하는 오류보다 최악인 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선택이 잠시 마음을 편하게 할 지는 모르겠으나 구조적인 문제로 만드는 건 그만큼 해결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이며 결국 내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체의 문제가 아닌 걸 전체로 비약하는 건 구조적인 진짜 문제의(를) 해결을 더디게 한다.
본래의 여성주의가 가진 철학은 그런 것이 아님에도, 여성주의가 남성에 대한(을) 혐오(하는) 수준으로 저평가 되는 이유가 뭘까. 그런 것들을 반성해 나가는 것이 궁극적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서도 득이 될 것이다.
이십대 후반 여성으로서 결혼, 출산, 양육 그리고 직업적 커리어를(경력) 동시에 이어가기 녹록치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그런 논의가(를) 본격적으로 나와야 할 시점에 구시대적 여성 해방을 부르짖는 부류를 보면 화가 난다. 이를테면 '혼인빙자간음죄'가 필요한 시대도 분명 있었으나 그런 죄가 존재하는 한 여성은 성적자기결정권 따위는 없는 수동적인(끌려가는) 존재가 된다.
일부 여성의(이) 억지가(를 부려서) 다수 여성의 삶을 더 고난하게 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하나 일부에겐 이런 얘기도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빙글거림으로 치부될 테니 그것 역시 씁쓸한 풍경이다.
# by 누운돌 | 2021/05/13 20:31 | 김어준 다스뵈이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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